대구지역 광장의 역사

1965년 '1차 도시계획재정비'.
 12개의 교통요지에  '광장'이란 이름과 함께 번호를 매겼다

현재 군부대 안에 위치해 본래 광장의 기능을 상실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광장들은 여전히 대구 교통의 요지로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반월당에서 만나요."

대구 '1호 광장' 반월당 네거리

반월당 일대는  조선 후기 , 전국에서 손꼽히던 서문시장과 약령시를 찾는
상인들로 늘 북적였다.

근대에 와서는 독재정권에 맞선 2.28 시위가 열려 아시아 최초의 민주
시민 혁명인 4.19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최근의 반월당은 23개 지하철역 출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대구상권'의
중심지이자 만남의 장소로 여전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역참이 있던 곳, 대구의 맨해튼이 되다 

대구 '6호 광장' 범어네거리

전국에서 가장 큰 교차로인 범어네거리는 차량 교통량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밀집된  초고층 아파트, 100여개의 금융기관, 법원, 언론사 등이 모여있다.

왕복 12차로와 16차로가 만나는 범어네거리는 지난 2002년과 2006년,
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려 거리응원을 하는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

고려시대, 개경에서 경주로 가는 길에 있던 역참이 '범어역'으로 불렸고,
이는 조선시대까지 유지됐고, 현재도 1만5천여 명의  시민들이  '범어역'을 이용한다.

"기사님, 7호 광장으로 갑시다~"

대구에서 택시를 타고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모든 기사가 서구의 두류네거리로 향한다.
대구 시민들 중에도 7호 광장을 모르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 정도다.

'7호 광장'은 유일하게 현재까지 광장으로 불리고 있는 곳이지만,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광장'인지 아는 사람도 드물기도 하다.

A.K.A. '광코'라고 불리는 '7호 광장'은 1970년대 이후
약 30년 만에 논밭에서 대구 제 2의 도심이자 젊음의 거리로 변신했다.

광장(廣場)

현재 대구의 광장은 도시의 확장과 발전에 따라 60여 개 로 늘어났다.

일부 광장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교통의 요충지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그 사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광장도 제법 되며, 아직 조성되지 않은 곳도 있다. 

14호 광장으로 지정된 '성서공단 네거리', 19호 광장인 '죽전 네거리', 28호 광장 '유천 네거리' 뿐만 아니라 최근 완공된 대구 외곽순환도로의  '파군재 나들목', '서변 나들목'  등 나들목 들도 광장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처럼 도시의 확장과 함께 대구의 광장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금도  조성중인 광장들이 모두 완성이 된다면 
대구는 대한민국의 남부권 교통의 수도로 거듭나 
활력 넘치는 도시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이다.

1965년 대구의 12개 주요 교통 요충지에 '광장'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 대구 광장의 첫 시작이다.
혼잡한 주요도로의 교차지점에 설치된 교통섬이나 입체화 등을 통해 차량과 보행자의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교통광장'인 것이다.

그로부터 5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대구의 광장은 정책의 일환이 아니라 2·28 운동 같은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 혹은 월드컵 거리응원의 명소로, 집회나 시위, 행진 등의 '소통광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구지역 광장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