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방네
<수성구편>
<수성구>
고산동
대구시 수성구 고산동은 대구시민이 흔히 시지동으로 아는 곳으로 수성구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 주거지역이다.
1981년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하면서 경산군 고산면이 대구시로 편입된 후 고산1ㆍ2ㆍ3동으로 분동되면서 현재의 행정구역이 완성됐다.
🔻고산동 유래
고산동은 삼한시대부터 조그만 나라의 일부였는데, 신라와 합쳐졌다.
신라 경덕왕 때는 장산군 읍서면, 고려 현종 때는 경주군 서면, 고려 충선왕 때는 옥산부 서면이라고 불렀다.
조선 선조 때 경산현이 대구부에 속해 대구부 부동면으로 됐다가 경산이 다시 현이 되자 경산현 현서면으로 바뀌었다.
조선 고종 때 경산군 서면이라 고쳐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산군 고산면이라 불렀다.
천혜의 자연환경 욱수골
욱수골은 대구에서 몇 안 되는 근교 휴식처 중 한 곳이다. 산은 높지 않고 물은 맑아 가벼운 산행이나 나들이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욱수골 초입에서 보면 동서로 산이 병풍처럼 펼쳐졌고 마주하는 중앙에는 옛 성터인 ‘자산성’이 버티고 있다.
골의 깊이는 6㎞에 달하며 맥반석이라 부르는 장석반암류가 많고, 물이 맑고 빛이 날 정도로 수질이 좋아 동명을 욱수라고 부르게 됐다.
따뜻한 봄날이 되면 덕원고 뒤 동산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다. 말 그대로 만산홍엽이 아닌 만산홍화의 장관이 펼쳐진다. 욱수천을 찾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
고산 곳곳에는 소중한 문화재가 즐비한다.
첫번째로 고산서원이 있는데 이곳은 퇴계 이황 선생과 당시 대구부사 우복 정경세 선생이 강학한 유서 깊은 교육기관이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끝까지 항쟁한 수많은 의병을 배출했던 곳이다.
또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1호와 3호인 ‘고산농악’과 ‘욱수농악’을 보유하고 있다. 사월보성아파트에 있는 대구시 지정 기념물 9호 ‘사월동 지석묘군’은 고산에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적 유산으로 유명하다. 대구시 지정 기념물 제16호인 ‘노변동 사직단’은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社))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수성구청은 매년 이곳에서 사직제를 열어 사직단의 역사ㆍ문화적 의미를 계승하고 있다.
만촌동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은 예로부터 학문과 강학을 중시하던 고장으로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관광지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각계동, 지장곡을 병합해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이 됐다. 그 후 1938년에 대구부에 편입됐다가 1980년 수성구가 신설되면서 수성구에 편입됐고, 1992년 만촌2동을 만촌2ㆍ3동으로 분동하면서 현재의 행정구역이 완성됐다.
🔻만촌동 유래
임진왜란 때 옥산 전씨들이 처음 정착한 뒤 달성 하씨, 달성 서씨 등이 문호를 차려놓고 강학에 힘을 쏟았던 곳이다.
반면 이들이 학문 숭상에 치중해 농사일에는 항상 이웃 마을보다 늦어 늦은 마을이란 뜻으로 ‘늦이’로 불리다 한자로 ‘늦을 만(晩)’자와 ‘마을 촌(村)’자를 써 만촌으로 불리게 됐다.
달구벌을 지키는 첫 관문, 영남제일관
영남제일관은 대구읍성의 남문으로 선조 23년에 처음 만들 때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됐다.
그후 영조 12년에 다시 돌로 쌓아 길이 약 2천650m 높이 5m로 축조됐으나 1906년 읍성이 철거될 때 성문도 같이 철거됐고 1980년 지금의 자리인 망우공원으로 옮겨 세워졌다.
최근 영남제일관 문루 마루청판 교체 등 보수공사와 함께 경관조명을 새롭게 설치해 더욱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탈바꿈하며 수성못과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새로운 야간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고국 그리는 스토리 스며든 ‘모명재길’
모명(慕明)은 두사충의 호로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 원군 와서 공을 세우고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을 기리고자 그의 후손이 세운 재실이다.
모명재 기둥에는 이순신이 먼 길을 마다 않고 두 번이나 도움을 준 두사충에게 고마움을 표한 한시가 주련으로 붙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순신과 두사충의 우정을 엿볼 수 있다.
수성구 만촌동과 고모동을 아우르는 길로 형제봉길, 모봉길, 고모령길, 팔현길 등 전체 4코스, 10.87㎞에 이른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만촌동 곳곳에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산재한다.
영영축성비, 대구부 수성비는 물론 고려시대 이부시랑을 지낸 하광신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문을 내려 세운 대구ㆍ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비인 하효자 정려각이 있다.
조선시대 향촌에 은거하면서 벼슬도 마다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한 하시찬을 추모하고자 제자들이 세운 재실, 독무재 또한 소중한 문화재다.
상동
신천을 사이에 두고 대구 남구 봉덕동과 인접해 있는 상동은 약 500여 년 전에 수성평야의 농막촌으로 형성되어 진씨와 손씨가 집단 거주하였던 마을이다. 본래 위화군이 있던 곳으로 920년 대구부에 편입되고, 그후 수현내면에 편입되어 상동이라고 하였다.
🔻상동 유래
신천을 사이에 두고 남구와 경계를 이루는 대구 수성구 상동. 예전에는 이 일대를 수성들로 불렀다.
물이 좋고 땅이 기름져 사람이 살기 좋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500여년 전 진씨와 손씨가 정착해 농막촌을 이뤘다고 한다.
현재 지역이 수성들의 위쪽에 있다고 해 ‘웃골’, ‘위동’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상동으로 됐다.
선사시대 흔적따라 상동지석묘
신천 주변에는 다양한 문화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현재 상동의 수성못 서편 제방에 위치한 4기의 상동지석묘이다.
근대화와 도시개발, 시민들의 인식부족으로 대부분의 지석묘가 사라졌지만 상동지석묘는 국립 대구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해 41기의 유구, 마제석검 2점 등 다수 유물이 출토됐다. 대구지역에서 처음으로 신석기 문화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빗살무늬토기 파편도 발견되기도 한다.
백성을 생각했던 인물·유산 숨 쉬는 곳
이서 선생의 치적을 기리고자 주민이 세운 송덕비인 이공제비.
홍수 때만 되면 신천이 범람해 피해가 극심했던 시기 대구 판관으로 부임한 이서는 사재를 털어 제방을 축조했고 주민들은 '이공제'라 칭했다. 이후 이서 선생의 업적을 영구히 기리고자 세운 송덕비가 이공제비이다.
역사를 벗 삼아, 새롭게 태어나는 마을
산업화 시절을 거쳐 지역의 부촌으로 각광받던 상동. 들안길 먹거리 타운과 함께 대구지역 최고의 도심 속 유원지인 수성못을 끼고 상동은 이제 가족, 연인, 지인 등의 만남의 장소로 변화하고 있다.
주민들은 자발적인 역할을 통해 변화의 시대 속에서 마을을 변화시켜 가고 있다.
또한, 상동 마을공정여행가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을 찾는 관광객에게 마을 홍보와 함께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철새 도래지
시민근린공원 옆 범어배수지 소나무 숲으로 시원스레 날갯짓을 하는 백로들을 볼 수가 있다.
소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고운 자태를 뽐내는 백로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소나무에 하얀 열매가 맺혀 있는 듯하다.
범어배수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심어져 있고 2㎞가량 떨어진 신천에서 먹이 활동을 할 수 있어 철새들의 서식지로는 안성맞춤이다. 새 둥지만 400여 개이며 날아드는 철새는 2천 마리 정도이다.
우리동네 ‘야시골 협동조합’
아파트 중심의 개발정책에서 벗어나 저층 단독주택지의 생활환경 개선으로 도시 부흥의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고자 수성구가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 일환인 수성 명품주택단지 조성사업으로 범어2동의 주택단지는 도시가스 보급, LED 보안등, 생활안전용 CCTV 등을 설치해 더욱 안전한 마을환경으로 태어났다.
또 밋밋했던 골목길에도 벽화디자인 조성사업을 추진해 활기를 불어넣었다.
파동
파동은 대구부 상수서면의 지역으로 파잠ㆍ파잠리라고 했는데 1914년 파남동과 파북동을 병합해 파잠동이라고 했다. 파동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 통신수단으로 사용되던 봉수대가 있으며 웅천에서 출발하여 김해, 밀양, 청도를 거쳐 이곳 파동을 통해 한양으로 가는 국도 역할을 하였다. 1914년 대구부 달성군 가창면에 편입되었다가 1958년 달성군에서 대구시로 편입되었고 그 후 1980년 대구시 수성구 파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파동 유래
파동은 예로부터 살기좋은 고장이라고 하여 '1파 2무'(첫째로 살기좋은 곳은 파동이며 둘째로 살기좋은 곳은 무태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려한 산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옛날 수성못 입구에서 가창까지 길이 곧다고 해서 '니리미'라고도 불리었으며 높고 낮은 산이 많다는 의미에서 ‘파잠’, ‘파집’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이곳에는 서당골과 용두골이 있는데 조선시대 서원이 많았다고 해서 서당골이라고 했다. 현재는 중화 양씨의 재실과 2개의 서원이 남아 있다.
앞산에서 동쪽의 파동쪽으로 내려오는 골의 형상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용두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744년 조선 성종 때 대사헌을 지낸 양희지를 추모하고자 세운 오천서원은 서당골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서원 앞은 암반이 하상을 이룬 계곡이 흐르고 100년을 훌쩍 넘은 수령인 듯한 둘레가 2m가 넘는 고목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서원 뒤 산기슭은 대나무밭으로 둘러 있다.
또 오천서원 초입에는 대구 유학의 큰 맥을 이룬 계동 전경창선생의 공을 기리는 무동재가 세워져 있다.
대도시 속의 골짜기 마을
앞산과 법이산이 양쪽에 자리 잡은 골짜기 마을인 파동의 기후는 사뭇 다른 지역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여름철과 겨울철 온도가 수성못 오거리 이전보다는 항상 2∼3℃ 정도가 낮다. 산속 골짜기에 들어온 것과 같이 기온의 변화가 다른 지역보다 크다.
현재 앞산 터널이 지나가는 파동 고가도로 아래는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겨울철 자연 얼음썰매장으로 지역에서 유일한 곳. 수백 명의 어린이와 부모가 얼음을 제치며 추억을 만들었던 장소이다.
파동의 끝자락 가창교 아래는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아직까지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개발의 바람이 적은 파동은 대도시 속의 시골과 같은 동네이지만 마을 구성원이 함께하는 공동체 사업은 타지역보다 앞서 시행할 수 있었다.
동네방네 <수성구편>
편집 : 임다영 dy1933@idaegu.com